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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교회] 베뢰아 사람들처럼 / 사도행전 17장 10~14절신약/사도행전 2020. 6. 30. 18:04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것을 보면 한마디로 절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구나, 혹은 자기 감정에 빠져 있고, 자기 생각에 잡혀 있을 때, 그 때는 볼 수가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정말 영적으로 눈을 떠서 볼 때, 조금만 더 넓게 보고, 조금만 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한마디로 시편 139편에 나오는 표현대로 심히 “기묘하심”. 옛날 성경에서는 이것을 “신묘막측”이라는 한자를 썼다. 영어 성경에서는 “fearful and wonderful” 그냥 wonderful이 아니라 fearful. 두려운 만큼 기가막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절묘하신 인도하심, 그런 것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무엇인가 하면 고난과 어려움과 힘듦과 만만치 않게 피곤한 환경 속에 있는 당신의 자녀를 그 가운데서 인도하시고, 그 가운데서 돌보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코로나19, 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 두렵긴 하지만 기대가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주실지 기대가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고 났을 때 주로 하는 이야기를 보면 주로 이렇게 말한다.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정말 어려울 때에도 숨쉴 구멍은 있어서 겨우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처절한 표현입니까.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애처롭습니까. 이건 겨우 먹고 산다, 입에 풀칠을 한다는 것과 같은 뉘앙스이다. 여러분 겨우 먹고 살면 안 된다. 제대로 먹어야 한다. 그건 인생이 아니다. 입에 겨우 풀칠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런데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애처로운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어려움을 겪었을 때 그들은 오히려 감사하고, 감격하고, 흥분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그들이 경험하게 되고, 발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절묘하신 인도하심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가막힌 타이밍에, 기가막힌 방법으로 그러면서 너무 적절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그렇게 인도하시는 역사하심을 경험했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그런 좋으신 하나님의 절묘하신 인도하심, 그 돌보심의 이야기인 것이다.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과 실라의 마지막은 사실 도망친 것이다. 10절 말씀을 보면,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행17:10) 여기 나오는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이 한마디가 그들이 어떻게 데살로니가를 떠났는지 다 말해주고 있다. 낮이 아니고 밤이다. 그야말로 야반도주한 것이다. “곧” 허겁지겁, 허둥지둥 떠났다는 것이다. 정말 힘들게 떠난 것이다. 도대체 데살로니가에서 바울과 실라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세 이레 안식일 동안 회당에서 열심히 말씀을 전한 것 외에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까지 동원해서 신앙의 형제 야손의 집에 쳐들어 오질 않나, 와서는 자신들 대신에 죄없는 야손과 그 형제들을 읍장 앞에 끌고 가서 고발하지를 않나, 또 읍장은 그걸 보고 보석금을 내게 하질 않나. 결국 형제들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서 밤중에 탈출해서 베뢰아로 갈 수밖에 없는 이 이야기는 결국 고난과 억울함과 환멸 그 자체였다. 잡아 죽이겠다는 사람을 피해서 밤에 도망을 칠 수밖에 없으니 고난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망을 해야 하니 억울함이요, 자신들의 얄팍을 입지가 흔들린다고 그렇게 무경우하게, 무례하게 모함하고, 난리치는 인간들에 대한 환멸, 그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 베뢰아로 가고 있는 그 길은 정말 힘빠지는 밤길이었을 것이다.
베뢰아라는 곳은 마게도냐 지방의 작은 도시이다. 마게도냐 지방은 그리스의 북부지방이다. 데살로니가에서 아덴까지 가는 큰길에서 옆으로 빠져 들어가는 곳에 있는 도시이다. 빌립보에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통과해서 데살로니가까지 갔다. 그 데살로니가에서 아덴까지 가려면 큰 길을 따라가게 된다. 그 가는 길에서 중간에 산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베뢰아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까 베뢰아는 별로 중요한 도시가 아니다. 그야말로 산 밑에 있는 작은 동네이다. 그런데 이 베뢰아가 신기하게도 역사에 나온 적이 있는데 무엇으로 나오냐면 도피처로 나온다. 주전 50년 경에 키케로라고 하는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가 로마 총독이었던 피소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그 기록에 나오는데 어떻게 말했는가 하면, “그가 덕망이 부족하여 데살로니가에 갔다가 거기서 반대자들의 위협에 무서워서 밤에 베뢰아로 도망하여 목숨을 부지했다.”고 하면서 베뢰아를 언급한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바로 주전 50년에 그 일이 있고, 100년 뒤에 바울과 실라가 똑같이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을 받고 밤에 도망을 쳐서 숨은 곳이 또한 베뢰아였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 피소의 경우와 이 바울과 실라의 경우는 언뜻 볼 때는 똑같은 것 같지만 정말 판이하게 다른 이야기이다. 피소의 경우는 목숨을 부재하기 위해서 숨었기 때문에 베뢰아에서의 그의 경험은 그야말로 절망과 허무, 두려움 자체였다. 너무나 비참한 상태로 베뢰아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의 경우는 다르다. 비록 그들이 피소와 똑같이 밤에 데살로니가에서 피해서 도망쳐서 베뢰아에 갔지만 그런데 베뢰아에서 그들의 경험은 그게 아니고, 놀라움과 회복과 감사와 감격이었다. 뜻하지 않은 놀라움, 회복, 감사, 감격이었다. 이걸 누가 준비하셨습니까? 좋으신 하나님, 절묘하신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다.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 그러면 누구를 위해 준비하셨습니까. 바로 신앙생활과 사역 가운데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치면서 상황의 어려움 가운데 지치고, 피곤하고, 힘 빠지고, 기쁨을 잃어버린 당신의 사람, 바울과 실라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다.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바로 베뢰아 사람들과의 만남을 준비하셨다.
11절~12절 말씀을 보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17:11~12) 바울과 실라는 어쩔 수 없이 도망친 베뢰아에서 뜻밖의 기쁨을,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된다. 주석가 중에서 랜스키라고 하는 분이 이렇게 말했다. “바울의 사역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페이지가 그곳에서 펼쳐졌다.” 그 정도이다. 열심히 사역했지만 핍박을 받았고, 열매도 없이 도망쳐야 했던 그 모든 실패와 무력감과 맥빠진 모든 것이 회복하고도 남는 경험을 그들은 베뢰아에서 했다. 무엇보다 특별히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들은 그곳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 깨어진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여러분, 사역자든 아니든 사람이 어느날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실망하고,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순간이 그가 가장 불행할 때이다. 절대 그러면 그는 삶의 능력과 기쁨을 가질 수 없다. 행복할 수가 없다.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저는 부부 세미나와 상담을 많이 해보지만 제가 볼 때 이 부부간에 가장 큰 위기는 무엇인가 하면 서로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다. 그렇게 싸우다가 다투다가 서로에게 실망하다가 결국 상대방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는 순간이 가장 큰 위기이다. 이건 정말 무서운 순간이다. 배우자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게 되면 이건 정말 위험하다. 여러분 목회와 사역의 위기도 그렇다. 목사님들과 많은 상담도 하지만 사역자들과 많은 상담도 하지만 정말 심각한 위기가 언제인가 하면 사역하다 보면 그 사역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처받을 수 있다. 원치 않게 공격 받을 수 있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언제가 위기인가. 그렇게 상처 받고 실망하면서 어느 순간 자기가 사역하는 사람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는 순간 이게 진짜 위기이다.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어, 내가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인생을 바쳐야 하는가, 그 순간이 위기이다. 정말 큰 위기이다. 삶의 위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의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고 힘들어서 내 입에서 인간이란이 나오면 안 된다. 인간은 아니다. 인간은 정말 말도 안 된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순간 그 자신의 삶에 정말 심각한 위기가 된다. 여러분, 사람에게 환멸을 느끼는 것은 죄가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찢고 할키고 간 통증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자리가 반드시 곪는다. 그 자리가 썪는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심각한 위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가 있어도 사람에 대한 기대와 꿈을 송두리째 버리면 절대로 안 된다. 우리가 신앙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경우를 보십시오. 예수님도 상처 많이 받았다. 예수님도 사람들한테 상처 많이 받았다. 그리고 주님도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믿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2장 24~25절을 보면,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2:24~25) 정말 상처 받고 얼마나 악한지 알았다. 그런데 주님은 한 번도 사람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시거나 그래서 포기하시거나 꿈을 버리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실망시키고, 힘들게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제가 읽을 때마다 울컥한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게 우리 예수님이다. 바울과 실라의 경우를 보면 빌립보에서 쫓겨 나오고 데살로니가에 가서 그렇게 모함 받으면서 밤에 도망쳤다. 그들이 가장 심각하게 받은 데미지가 무엇인가. 바로 사람에 대한 기대와 꿈이 깨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악하다는 것이 너무 실감난다는 것이다. 그때가 문제이다. 사람은 악하다. 사람은 죄인이다. 그게 실감날 때가 가장 무서운 순간인데 그렇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진리조차 거부하는 동물적적이고 세속적이고 소망이 없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이 너무나 확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것은 쓴 뿌리이다. 쓴물이 올라오는 것이다. 이건 상처이다. 그런걸 바울과 실라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베뢰아에 가서 뜻밖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사람들에 대한 깨어진 이미지가 다시 회복되었다. 사람들은 다 통속적이고, 이기적이고, 저급하고, 악하고, 추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깨어진 이미지가 회복되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다시 발견했다. 여러분 사람에게 감격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 사람에게 환멸을 느끼면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람에게 감격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베뢰아에 가서 사람이 얼만큼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다시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좋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누구를 위해서, 바울과 실라를 위해서.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일인 줄 믿는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베뢰아 사람을 그려 보면서 정말 전심을 다해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이들은 전심을 다해서 말씀을 들으면서 그 정도가 아니라 받은 말씀을, 배운 말씀을 삶속에 적용하면서 믿음을 키워가는 모습을 그릴 때 제가 느낀 것은 사람이 아름답기 시작하면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슴이 훈훈해졌다. 제 마음의 밑바닥에서 이런 기도가 올라왔다. “주님! 우리 호산나 교인들이 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나왔다. 성 프란시스의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기도는 한 번 하면 계속 속에서 울린다. 그것처럼 “주여 호산나 교인들이 베뢰아 사람들처럼 되게 하옵소서!”하는 기도가 계속 울린다.
여러분 지금 한국 교회는 위기이다. 지난주 목요일날 성시화운동본부에서 코로나19 목회자 세미나를 열어서 다녀왔다. 거기가서 확인하고 나눈 것이지만 코로나19 사태는 한국교회에 위기이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이번에 빠진 게 아니다. 벌써부터 위기였다. 코로나19 때문에 위기가 온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부터 한국교회는 위기에 있었다. 그런데 그 위기 가운데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이냐 그건 한국교회가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비호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이 서로에 대해서 존경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아름다울 때는 교인이기 때문에 가슴이 설랬던 순간이 있었다. 교인이기 때문에 너무 귀했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존중하지 못하고, 존경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경멸한다. 이게 정말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란 그렇게 추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간이란 그렇게 악하고 저급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신앙 안에서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그걸 보여주는 베뢰아 사람 같은 사람들이 정말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다. 바로 지금! 그래서 “주님! 우리 호산나 교인들이 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는 것이다. 너무나 절박하다.
그러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된다는 게 무엇일까. 그들의 어떤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운가. 11절 말씀을 보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 여기 나오는 단어 중에서 “너그러워서” 이게 중요한 단어이다. 이것이 헬라어로 하면 “유게네스”라는 단어이다. 옛날 한글 개역성경은 어떻게 번역했는가 하면 독특한 말로 번역했다. “신사적이어서” 영어 성경은 이걸 “noble character” 그냥 번역하면 “고상한 성품이어서”이다. 이게 답이다. 베뢰아 사람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핵심은 그들은 고상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러면서 아름다운 영향력이 퍼져나가서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이 기가막힌 흐름의 이야기. 이것이다. 이 고상함이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가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한국교회의 가장 절박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이 고상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너무 저급했다. 너무 추했다. 입으로만 거룩함을 이야기하지만 마음 속에 더러운 물질에 대한 욕심, 세속에 대한 욕심, 인간적 욕심, 상처를 그냥 가지고 포장하고 살았다. 그러니 저급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 그러면 안 된다. 정말 이 땅을 바꾸는 것은 어떤 무브먼트가 아니다. 운동을 일으키는 게 아니다. 다만 성도들이 이 고상한 성품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이게 정말 중요하다. 고상한 성품. 그런데 우리 교인들도 베뢰아 사람들처럼 되려면 고상한 성품을 가져야 하겠는데 성경을 보면 안타깝게도 베뢰아 사람들이 이렇게 고상한 성품을 갖게 된 것이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가 안 나온다. 그냥 고상한 성품이어서라고 나오지 어떻게 가졌는지가 안 나온다. 뭐 많이 배웠다든지, 물질이 넉넉해서라든지, 훈련을 받아서라든지 그런게 하나도 안 나온다. 이게 너무 어렵다. 그래서 제가 연구하고 묵상하는데 더 기가막힌 것은 무엇인가. 캘빈의 주석을 찾아서 이 부분을 읽었다. 거기 이렇게 나온다. “유게네스 테로이” 이것은 정신이나 심리에 관한 말이 아니라 혈통에 관한 말이다. 그 순간 앞이 막막했다. 그럼 결국 베뢰아 사람처럼 고상한 성품이 되는 길은 없단 말인가. 혈통이라고 한다. 원래 그렇게 낳아야 한다. 제일 절망스러운게 그것이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까. 타고 나야 한다. 그럼 끝난다. 어떻게 해야 겠는가. 그렇게 낳지 않았다. 공부해서 되는 것이라면 열심히 해본다. 돈 벌어서 하는 것이라면 열심히 벌면 된다. 어떤 수양을 쌓아서 되는 것이라면 해보겠다. 이게 아니다. 혈통이라고 한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괴롭게 질문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제 마음에 질문하셨다. “너 정말 공부는 고상해질 만큼 할 수 있느냐” “너 돈을 고상해질 만큼 벌 수 있느냐” “너 고상해지는 훈련 있다면 받아볼 수 있느냐” 그렇게 해서 고상해 질 수 있다면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면서 제게 강렬하게 들어온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그게 바로 거듭남이다. 바울사도가 그의 서신서에서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새 사람이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변하는 비밀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변한다는 것은 우리가 달라지는 게 아니다. 개선되는 게 아니다. 다른 혈통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유게네스가 바로 그것이다. 고상한 성품은 어떤 훈련으로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새 사람이 되어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뢰아 사람들처럼 산다는 것은 새 사람이 된자가 새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걸 그대로 표현한 말씀이 에베소서 4장 22~24절 말씀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어떻게 변합니까?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비밀을 말해준 것이 오늘 말씀에 나온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베뢰아 사람처럼 우리가 되기 위해서 어떤 비밀이 오늘 말씀에 나온다. 그것은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라고 하는 표현이다. 아주 실제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도 복음을 들었다. 복음을 듣고 그들 마음 속에 반응했다. 그래 거룩하게 살아보자, 아름답게 살아보자,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런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 언제나 영적 역사가 그런 것처럼 복음을 듣고 좋았던, 거룩했던, 고상한 마음이 올라오는 그 순간에 한쪽에서는 또 악한 마음이 올라오는 게 인간이다. 한쪽에서 욕심에 따라서 그 말도 안 되는 교만 때문에 우리도 유대인인데 쟤들만 유대인이야, 저것들은 뭐야, 사람들이 쟤네들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성경 말씀에 시기심이라고 말했다. 그런 어떤 죄성에서 나오는 그 마음이 같이 올라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이 복음에 대해서 올라오는 이 고상한 마음이 아닌 그 죄성의 마음을 붙잡았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러분 예수 믿고 여기 와 있는 것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이다. 특별히 또 이야기한다면 바울과 실라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이 순간에, 복음을 듣는 순간에 점점 더 거룩한 고상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영적인 마음이 올라오지만 한쪽에 분명히 인간이니까 저 낯선 것들은 뭐야 도대체, 저것들은 뭐야 우리가 왜 저것들의 말을 들어야 돼, 믿을 수 있겠어, 이런 생각이 왜 안 올라왔겠습니까. 그런데 그 마음이 올라오는데 그 죄성을 택한 것이 아니라 바로 복음의 고상함을 붙잡았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의 뜻이다. 그리고 바로 이 역사는 십자가의 역사이다. 전 여러분이 날마다 마음 속에서 이 십자가의 역사, 승리를 맛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래야 베뢰아 사람이 된다.
사랑하는 호산나 성도 여러분,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 모두가, 우리 모두가 베뢰아 사람들처럼 고상하고 아름다울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러분, 우리는 그럴 수 있다. 우리가 정말 고상할 수 있을까. 우리가 정말 아름다울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니까 우리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고상하고 아름다우라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시면서 구원하셨으니까 우리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개가 토한 것을 먹듯이 옛날의 그 추함과 더러움을 추구하면 안 된다. 우리는 정말 반드시 고상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우리 주님이 그러라고 대신 목숨을 버리셨다. 그리고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성도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사람에 자체에 대해서 실망하고 포기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그런 게 많습니까. 요즘 저는 뉴스 보다 보면 정말 나도 모르게 사람에 대한 포기하는 한숨이 나온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뭐 이럴 수 있냐 사람이. 그 악함에 대해서 그렇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 가운데 우리가 받은 사명 가운데 그리스도인이였다면 가장 큰 사명은 정말 그런 사람들 앞에 우리가 보여줘야 한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그 고상한 성품,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래야만 한다. 이게 우리 사명이다. 어떤 것보다 이게 중요한 사명이다.
제가 말씀을 마치면서 생각해 봤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그렇게 고상한 성품의 사람이 누구 있을까. 너무 많다. 그 중에 떠오른 것은 바로 요셉이었다. 애굽의 총리를 지낸 요셉. 여러분 요셉은 총리여서 높은 것이 아니라 그 고상함 때문에 높은 것이다. 총리여서 존경 받는 게 아니다. 그 고상함 때문에 존경받는다. 얼마든지 추할 수 있었다. 더러운 욕망에 따라서 복수심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렇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게 하나님의 사람이다. 전 여러분 모두가, 제가 바로 그런 고상한 성품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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