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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교회] 거기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 사도행전 16장 16~26절신약/사도행전 2020. 4. 22. 13:11
여러분도 미디어를 통해서 보고, 들어서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코로나19, 이것은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 같다. 백신이 나올 때까지 전세계 모든 나라들은 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잡혀서 아주 어려운 시간들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코로나19, 이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가 비상사태 가운데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 가운데서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가. 이게 정말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냥 무조건 일상을 회복하자고 하면 감당못할 대량 감염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계속 비상사태로 가고 있으면 우리 삶 자체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을 막으면서 우리가 회복할 수 있는, 일상을 회복해 내는 정말 좁은 길을 가야 한다. 그것 중에 하나가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불편한지, 하지만 그런 가운데 예배드리기를 시작한 것이 그 좁은 길을 가는 것 중 하나이다.
오늘 말씀을 코로나19 이전에 나누었던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 말씀이 묵상해 보니 마치 이 상황을 위해서 미리 준비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당연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정말 하나님께서 오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강해설교를 통해서 주신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예비 되었는지 함께 보도록 하자.
바울 사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소아시아에서 이제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했다. 말씀드린 것처럼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성령이 주시는 감동에 따라서 순종함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지난 번에 설교할 때 말씀하신 것처럼 기도가 열쇠이다. 그런 막막함을 풀 수 있는, 그런 대책이 없는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열쇠가 있다면 기도가 열쇠이다. 인간적인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안식일이 되었는데 예배드릴 곳도 없을 때, 그 막막함 가운데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이 한 것은 기도하러 강가에 간 것이다. 그런데 갔더니 거기에 성령께서 예비하신 사람, 두아디라 성 출신인 자주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가 있었다. 그 루디아가 바울을 통해서 전해진 복음을 다 듣고, 다 받아들이고, 믿으면서 자기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면서 루디아는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오라고, 단지 숙식제공이 아니라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빌립보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모든 기초가 다 놓여지게 되었다.
이제는 교회를 세우기만 하면 된다. 그동안 막막했다. 이제는 그림이 보인다. 어떻게 하면 된다는 게 보인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 바로 이런 상황인데 바울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과 달랐다. 사도행전 16장 16절 말씀을 함께 읽는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행16:16) “우리가 기도 하는 곳에 가다가”, 무슨 말씀입니까? 여전히 기도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문이 다 열린 것 같고,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지 분명히 다 나온 것 같아서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런 상황에서 결코 자기 생각대로 먼저 뛰어 나가지 않고 계속 기도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신앙의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바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막막할 때는 기도한다. 길이 안 보이고 대책이 없을 때는 정말 기도하면서 매달리는데 그러다가 상황이 조금 좋아지고, 뭔가 조금 보이고, 될 것 같고, 계산이 나오고 그러면 기도를 멈춘다. 그리고 나가서 일하기 시작한다. 자기 방식으로 한다. 그런데 여러분 아세요, 사실 그때가 가장 기도가 필요한 순간이라는 것을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 방식으로 해버리니까 그래서 주님 역사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도하는 곳에 다니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먼저 봐야 하는 첫 번째 중요한 메시지이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기도하는 곳에 다니면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예기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한 귀신 들려서 점 치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가 계속 따라다니면서 소리치고 귀찮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 표현대로 보니까 괴롭게 했다고 한다.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 견딜 수가 없어서 바울 사도가 그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건 좋은 일이다. 귀신 들린 여자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정말 좋은 일이고,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이 여인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준 이 일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여인, 사실 노예였다. 여종이다. 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주인들이 있었다. 저는 성경 보면서 깜짝 놀랐다. 주인이 하나가 아니고 주인들이 있었다. 결국 이 귀신 들려 점치는 이 여인은 일종의 주식회사였다. 정말 나쁜 놈들이 많다. 그 여인 하나 여러 명이 공동 투자해서 거기서 뜯어 먹고 있는, 빨대 꽂은 인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상황이다. 그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가 관청에 고발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고발하면서 죄목을 슬쩍 바꿨다. 원래 그들이 분노했던 것은 자기들이 이익이 끊어진 것이었는데 그건 자기들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귀신 들린 여자를 이용해서 돈 벌어 먹는 것은 정말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아니면 그 여인한테 귀신을 쫓아내준 것, 이것만 가지고는 이 사람들을 고발해봤자 죄목이 안 될 것 같았는지, 슬쩍 죄목을 바꾼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인데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 못할 풍속을 전해서 성을 심하게 혼란하게 한다는 식으로 죄목을 바꾸는 것이다. 사실 전혀 해당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자기들 본 마음은 자기들의 돈줄 떨어진 것 때문에 고발하면서도 그것이 아니라 마치 로마의 풍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 사회의 공동성을 지키기 위해서,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속이고 있다. 이건 거짓말이다. 예나지금이나 세상에 악한 것들이 믿음의 사람들을 핍박할 때 하는 패턴은 동일하다. 결국은 다 자기 얄팍한 이익이나 이기심, 자존심 때문에 자기가 상처 받아서, 자기 기분 나뻐서 공격하면서도 이것들은 그렇게 말하면 창피하니까 그런지 그럴 듯한 이유를 만들어 낸다. 무슨 대의를 위한 것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처럼,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런 것처럼, 혹은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공격할 때를 보면 신앙을 위한 것처럼, 교회를 위한 것처럼 그런 식으로 포장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면 그런 고발을 받은 관원들도 정말 한심하다. 사람들이 선동해서 소리지르게 하니까 그 소리지르는 말에 우쭐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그 이야기를 듣고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서 벗기고 매를 때리게 한 다음에 감옥에 집어 넣었다. 사실 옷을 찢어서 매를 때린다는 것은 굉장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하는 형벌이다. 그러니까 형이 확정되야 할 수 있는 것인데, 재판도 안하고, 무조건 때리고, 감옥에 집어 넣은 것이다. 모르겠다. 이것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아마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악의 커넥션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뭔가 뒤로 다 함께 짜고 하는 것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그 관리가 그날 아침 부부싸움을 하고 나와서 기분이 나빴든지. 여튼 말도 안 되는, 너무나 부적절한 조치였다. 그 결과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들어가서 잡혀있게 되었다. 너무 심하게 맞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아픈 것은 너무 심하게 모욕을 당했다. 여기 말씀에 장터라고 하는데 그걸 헬라어로 말하면 아고라이다. 그건 단지 시장터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는 공공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무슨 흉악한 범죄자처럼 옷을 찢겨 벗기고 매질을 당하고 수치를 당했다. 그것도 거짓과 부패에 의해서 억울하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더구나 기가막힌 것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부패한, 그런 무지막지한 자들이 이제 재판을 할 것인데 잘못한 것은 없지만 그런 자들이 재판하면 결과는 뻔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전도와 선교는커녕 잘못하면 몇 년 동안 감옥에 잡혀 있어야 한다. 아니면 노예로 팔려가서 노예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종신형으로 감옥에서 있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다. 그런 불확실성이 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항상 최악을 상상한다. 그런 생각이 막 밀고 들어오고 있는, 그런 생각이 사정없이 괴롭히고 있는 그런 현장인 감옥에 앉아서 바울과 실라는 밤을 새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면의 밤, 두려움의 밤, 분노의 밤, 고통의 밤, 이런 것들이 예상되는 이 현장에서 그들이 밤을 새고 있었는데 그 현장에서 그들이 한 행동은 그야말로 의외의 것이었다. 그들이 한 모든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상황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그런 행동을, 그런 반응을 그들은 보이고 있었다. 미친 것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5절 말씀을 함께 읽는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미치지 않고는 그런 일을 당하고 이렇게 불안하고 갑갑한 순간에 어떻게 찬송을 부를 수가 있습니까. 기도하는 것까지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온전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들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고 한다면 그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신앙인이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바울과 실라가 그 빌립보 감옥에서 한밤중에 도저히 찬송부를 수 없는 순간에 찬송 부른 걸 놓고는 해석들이 참 많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니까. 그 중에 하나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힘들고, 억울하고, 분해서 잊으려고 찬송을 불렀다.’ 너무 분하고, 너무 억울하고, 너무 힘들어서 잊어보려고 찬송을 부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더 심하게 나가서 그런 마음에 너무 땅바닥을 쳤더니 지진이 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분 절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때 바울과 실라가 찬송했다는 헬라어가 바로 ‘휨네오’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은 우리 말로 ‘찬송하다.’로 번역이 돼서 사실 다른 찬송과는 구별이 안 된다. 우리는 찬송을 다 한 가지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영어는 정확히 구별하고 있다. 영어로는 이것이 바로 ‘Hymn’이라고 한다. 여러분 찬송도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가스펠송 같은 것들, 복음송이라고 번역하는 이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다. 그 찬송은 듣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이 대상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그런 식의 노래가 있다. 또 어떤 노래는 영적 전쟁을 하면서 이기기 위해서 군가처럼 부르는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이런 것이다. 이건 거의 군가이다. 그리고 어떤 것은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종의 사랑을 나누는 교제의 노래가 있다. 그래서 축복송, ‘너는 담장 넘어로 뻗은 나무’ 축복하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또 어떤 것은 자기 마음에 있는 어떤 마음을 영적으로 잡는 영성을 위한 노래도 있다. 그런데 이 Hymn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노래가 아니다. 이 hymn은 하나님께만 올려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노래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경배와 찬양이다. 이것은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올려드리는 경배와 찬양, 예배의 노래이다. 그게 바로 Hymn이다. 그렇다.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부른 찬송은 Hymn, 즉 worship song이었다. 다른 노래가 아니다. 군가가 아니다. 이것은 바로 경배와 찬양, 워십송이었다.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는 그런 노래였다. 정말 거룩과 감사 가운데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올려드리는 그런 찬송이었다. 모르겠다. 처음부터 그런 감사와 찬양의 마음이 되어서 그렇게 노래했는지, 하지만 제가 볼 때는 그럴 수 없다. 그런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 말씀을 보니까 이 이야기를 보니까, 이 이야기를 설명할 때 두 개의 분사를 사용한다. 분사라는 것은 결국 어떤 진행을 말한다. 두 개의 분사를 하는데 하나는 기도하고(praying)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찬송하매(singing hymns)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처음에는 답답해서 기도를 시작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기도를 시작했다. 정말 힘들고, 어렵고, 두렵고, 고통스러워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놀랍게도 기도의 결론이 바뀌기 시작했다. 기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무엇으로? 찬송하는 것으로. 그렇게 힘든 마음으로 기도했는데 기도하다 보니까 이것이 바뀐 것이다. 찬송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그 은혜를 송축하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여러분 이게 신앙의 역사이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의 역사이다. 저는 여러분이 그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신앙인은 그럴 수 있다. 바로 그래서 결과적으로 전혀 그곳하고, 그 상황하고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나온 것이다. 그들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으면 그들이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세상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이 그곳에서 벌어진 것이다. 어떤 일인가. 분노와 억울함과 두려움과 고통스러움이었는데 그게 갑자기 감사와 기쁨이 되었다. 그 자리는 고통스러운 자리였고, 정말 감옥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곳이 예배의 자리가 되었다. 그곳이 성전이 되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정말 억울하게 고발 당하고, 매를 맞고, 수치를 당하고, 잡혀서, 묶여서 죄수로 있는 죄수들이었는데 갑자기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예배자가 된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답은 그들이 바로 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가졌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 삶 가운데 우리 삶이 고통스럽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로 문제에 봉착했다는 뜻이다. 문제가 삶의 어려움이다. 그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삶의 어려움, 그건 바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도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진짜 어려운 문제가 그들에게 닥쳐온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귀신 쫓아내준 것 때문에 갑자기 고발 당해서 잡혀서 맞았다. 맞아서 몸이 아픈 것도 문제지만 결국은 거짓으로 고발하고, 비열하게 고발한 그 귀신 들린 여자의 주인들의 더러운 행동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이게 문제이다. 거기에 부패하고 썩어버린, 어리석고 미련한 관원들에 의해서 저지러진 만행,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이야기, 그 모욕과 수치, 정말 그것에 대해서 솟아오르는 분노가 있지만, 억울함이 있지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문제이다. 화는 나는데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풀 방법이 없는, 그게 감옥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묶여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다가오고 있는데 두려움을 이길 방법이 없는 그게 바로 문제인 것이다. 풀어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데 해결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찬송을 불렀다. 무슨 뜻인가. 문제가 풀렸다는 뜻이다. 문제가 그냥 있으면 찬송을 못 부른다. 문제가 풀렸다는 것이다. 문제가 더 이상 그들에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 문제가 우리한테 있으면서 안 풀리면 문제는 저주이다. 하지만 문제가 풀리면 축복이다. 안 풀리면 저주이지만 풀리면 그같은 축복이 없다. 그게 문제이다. 만약 그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었다면 그들은 문제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에 찬송을 불렀을 것이다. 이런 어려움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 모욕이나 상처를 받지 않은 것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상황을 부정하고 나를 부정하고, 자아가 깨져버렸으니까. 그런 상태가 되어버렸으니까. 그야말로 실성해서 노래를 불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미친 것이니까. 그러나 여러분 신앙인은 절대 그것이 아니다. 그들은 문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 감정을 조작하지 않는다. 그렇게 힘든데 안 힘든 것처럼,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하지 않는다. 바울과 실라를 보자. 그 다음날 관원들이 바울과 실라를 슬쩍 놓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잘못한 것을 알았다. 그때 바울과 실라가 따진다. 무슨 이야기인가. 상처 받았다는 것이다. 억울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화가 나있다는 것이다. 절대 아닌 것처럼 조작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찬송을 부를 수 있었는가. 그들은 문제는 있는 그대로 다 직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문제에 답을 가졌기 때문에, 그 문제를 풀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가, 문제가 안 되니까 찬송을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어떤 심각한 문제에도 답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경제적 어려움? 문제이다. 하지만 답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문제가 될 수 없다. 여러분 관계의 어려움도 마찬가지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당장 다가오는 여러 가지 핍박과 비난, 그 모든 어려움도 마찬가지이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어떤 고질병과 같은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그게 끈질긴 문제라도 답을 갖게 되면, 우리가 거기에 답을 갖고 있게 되면 더 이상 문제일 수가 없다. 여러분 신앙인들은 이 세상 가운데 문제를 당하지 않거나, 혹은 그 문제를 피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에 대하여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반전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멕시코 중남미 선교를 사명으로 주셨기 때문에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 멕시코 선교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처음 시작할 초창기 무렵에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방법을 찾다가 거기 그 선교사님 한 분을 통해서 멕시코 현지 교단과 함께 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 교단이라고 소개하시길래 한국 교단을 생각하고 왠만한 정도인 줄 알았다. 교단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교회가 많이 있고 그렇다. 그래서 왠만하겠지 생각했는데 그건 진짜 작은, 아주 초라한 교단이었다. 일단 교회 수가 30개도 안 되고 20 몇 개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곳도 제대로 된 교회는 한 곳도 없다. 다들 미자립이고, 거기에 있는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들이 제대로 신학 공부한 분들이 아무도 없었다. 제가 볼 땐 거의 자기가 자기 머리에 안수한 사람들이 확실하다. 그냥 자기가 안수하고 목사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교단이라고 말할 수 없다. 너무나도 빈약하고 초라한 교단이었다. 그런데 교단은 그렇게 보잘 것 없는데 그 교단 이름은 제가 지금까지 들어본 교단 이름 중에 가장 강력하고 거창했다. 얼마나 대단한지 어떻게 교단 이름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교단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스페니쉬로 ‘Jesecristo es la respuesta’(예수 그리스도는 대답이다.) 이다. 합신 총회 교단 이런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대답이시다 교단이다. 이것도 거창한데 이게 풀 네임이 아니다. 풀네임은 더 거창하다. 원래 풀네임으로 보면 거기에 엘 문도라고 하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원래 교단 풀네임은 ‘Jesecristo es la respuesta para el mundo’(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위한 대답이다.)이다. 교단은 진짜 별 것 아닌데 이름은 진짜로 거창하다. 그리고 그 이름이 저한테 강력한 메시지이다. 전 정말 우리 교단 이름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어느 교단 출신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위한 대답이시다 교단 출신입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게 복음의 핵심이니까. 이게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 모든 사람, 모든 인생 문제의 대답이십니다. 이게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 모든 인생, 그 모든 인생 문제의 대답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이걸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리고 어떤 자리에 있든지 대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 모든 문제를 풀어내고 그게 가난이든, 질병이든, 상황이든, 정치적인 문제든, 무엇이든간에 대답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답을 얻으면서 풀어내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인줄 믿는다. 그게 여러분과 저인줄 믿는다. 그게 맞는 것이다.
오늘 설교 제목은 조금 특이하다. ‘거기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원래는 앞에 ‘그래요’도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뺐다. ‘그래요 거기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언뜻 볼 때는 설교 제목으로 적합해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빌립보 감옥에서, 그 말도 안 되는 자리에서, 그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찬송을 부르고 있는 바울과 실라, 그 믿음의 사람들을 떠올리는 순간, 가슴에서 울을 수밖에 없는 감격이, 막을 수 없는 메시지가 차올랐다. 그러면서 제 앞에 얼굴들이 지나가는데 바로 지금 삶 가운데 여러 가지 문제로 고통하고 있는 성도들 얼굴이, 지금 코로나19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여러 가지 상황과 예상 되는 문제 앞에서 정말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랑하는 모두의 얼굴이 제 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말 말해주고 싶었다. 그 모든 분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상황이 그렇게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답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다. 거기에서도, 그런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찬송을 부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거기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고 말하고 싶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거기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게 신앙인이다. 그게 우리이다. 그게 우리가 받은 은혜이다. 모든 문제의 대답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 비밀을 깨달으면서 그렇게 깜깜하고 어려운 자리에서도 정말 불연히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이 시대의 바울과 실라,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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