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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산나교회] 말씀으로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 / 사도행전 17장 1~9절
    신약/사도행전 2020. 6. 30. 13:58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코로나19 때문에 교회학교가 아직 모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린이가 모이지 못하는 어린이 주일을 맞게 된 것이다. 너무나 속상하고, 안타깝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 그런데 그래도 감사한 것은 오늘 우리가 가능한 가운데 온 세대 예배로 드린다는 것이다. 여전히 미취학 아이들은 올 수 없고, 70세 이상 어른들도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온 세대라고 말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부분적이지만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그런 예배를 드리니까 마음에 위안도 되고, 제 마음 속에 비장한 결단도 하게 된다. 어떤 결단인가 하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잘 지켜서 우리 자녀들의 세대에 아름답게 넘겨 주겠다는 결단이다. 어떤 경우에도, 코로나19 아니라 경제적인 어려움 아니라 몸이 아픈 것 아니라 어떤 힘든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임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잘 지켜서 우리 자녀들의 세대에게 아름답게 넘겨주겠다는 결단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싸움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싸움이다. 겉으로 볼 때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 같지만 신앙의 사람인 우리에게 있어서 싸움의 본질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나라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나라를 어떻게 전파할 것인가. 여러분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받으려고 한다.

     

    오늘 말씀을 함께 보겠다. 바울과 그 일행들은 이제 빌립보를 떠나서 압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에서 다녀가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들을 때는 압비볼리나 아볼로니아를 다 들려서 방문하고 그렇게 간 것처럼 해석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런 뜻이 아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통과하여 라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을 보면 ‘pass through’라고 썼다. 그냥 통과한 것이다. 성경에 정확히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이 표현의 뉘앙스로 볼 때 이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 직선 거리로 200km이다. 200km의 거리를 쉬지 않고 갔다는 뜻이다. 지금이야 200km정도는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한 번에 갈 수도 있는 거리이지만 그 당시로 볼 때는 대단히 먼 거리였다. 더구나 직선 거리로 200km였으니까 꼬불꼬불 가게 되면 300km도 넘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 도중에 다른 도시가 없는 것도 아니고 압비볼리나 아볼로니아 같은 소도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를 통과해서 데살로니가까지 그 먼길을 쉬지 않고 단번에 달려갔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렇게 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캠벨 몰간이라고 하는 영국의 유명한 강해 설교 대가가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성령이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성령이 인도하셨다고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께서는 왜 그렇게 인도하셨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무의식 상태로 만들어 놓고 인도하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인도했다는 것이 맞다고 할지라도 그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분명히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왜 그랬을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데살로니가가 그 근방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맞다. 데살로니가는 그 근처, 마게도냐 지역, 그리스의 북부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이었던 캇 산더, 네 명의 장군이 알렉산더의 제국을 분활했는데 그 중에 그 지역을 맡았던 사람이 캇 산더이다. 캇 산더가 자기 아내인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 동생, 데살로니케이다. 데살로니케라고 하는 자기 아내 이름을 붙여서 만든 도시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도시는 마게도냐의 제 2 구역의 수도이고,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이다. 그런데 그곳으로 달려간 이유는 데살로니가가 큰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냐면 바로 거기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기 때문이다. 1절에도 그게 나온다. 거기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다. 그러면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바로 거기에 가면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 거기에 가면 말씀을 구약 성경부터 시작해서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았지만 1차 전도여행 당시에 구브로에서도 그랬다. 바울과 바나바가 시리아 안디옥에서 구브로에 도착해서 살람이라고 하는 곳에 갔는데 거기에서 그 구브로 섬을 관통해서 바보까지 가려고 한다. 여기에서 바보는 멍청이의 사촌 바보가 아니고 도시 이름이다. 그 바보라는 도시까지 갔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다. 이 전도자들에게 있어서 오직 달려갈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쉬지 않고 200km를 달려서, 300km를 달려서 데살로니가까지 간 이유는 거기에 회당이 있고, 바로 그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톨스토이가 쓴 작품들, 톨스토이는 러시아 유명한 문호이다. 톨스토이가 쓴 작품이 참 많다. 그 작품들 가운데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톨스토이 단편선이라고 하는 단편 모음집이다. 왜냐하면 짧기 때문이다. 늘 굳게 믿는다. 짧은 책이 좋은 책이다. 두꺼운 책은 나쁜 책이다. 저는 그렇게 믿는다. 짧은 것뿐만 아니라 쉽다. 어려운 책이 아니다. 그리고 재미가 있다. 이 톨스토이는 동화 같은, 러시아 민화 스타일의 많은 단편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민화 같은, 동화 같은 이야기를 쓰면서 거기에 정말 귀한 영적인 메시지를 집어 넣었다. 그러니까 이건 딱 제 스타일이다. 제가 참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우리 자녀들에게 이 책을 다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읽어보라고 하길 바란다. 영적인 깊이가 있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단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구둣방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던 천사 미하엘의 이야기이다. 자세한 내용은 읽어보시길 바란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제목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인데 이것은 이 이야기의 제목일 뿐만 아니라 톨스토이의 모든 단편들의 주제이다. 그의 모든 작품들의 주제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스스로 이 질문을 하면서 고민하면서 살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작품을 쓴 사람이다. 그리고 그 대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았다. 그 은혜로 산다는 것이다. 그 구원의 은혜로 산다는 것이다. 그게 톨스토이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귀한 작품으로 은혜를 받고 나서 이 제목, 이 주제를 가지고 제 목회적 현실에 적용하고 바꿔서 이렇게 질문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변하는가목회의 궁극적 목표는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변화돼 나쁘게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변하는 것이다. 이게 정말 중요한 것이다. 이게 목회의 목표이고, 신앙생활의 이유가 된다.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표어 중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변하든지, 떠나든지이다. 이 표어에 대해서 잘못듣고 떠나라고 하는구나 하고 떠나면 안 된다. 떠나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다. 오죽하면 그런 표현을 쓰겠는가. 변하는 게 너무 중요하니까. 꼭 변해야 하니까. 그래서 변하든지, 떠나든지변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너무 중요한 이유가 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변할까. 여러분 사람은 무엇으로 변합니까. 사람이 진짜로 변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바로 그 대답은 말씀이다. 사람은 말씀으로 변한다.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사람은 기적과 역사로 변했다고 말한다. 불치병이 나았다든가,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든가,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든가 바로 그런 것 때문에 내가 변했다고 한다. 사실 그런 기적과 역사는 그에게 어떤 충격을 주어서 그를 흔들수는 있지만 그를 진정으로 변하게 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변한 이유는 다른 지체들의 사랑과 친절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이 사랑과 친절로 나를 대해주니까 자기가 변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랑과 친절은 그의 마음을 녹아지게 할 수는 있지만 진짜로 변하게는 못한다. 진정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은 말씀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 기적이, 그런 사랑이 계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결국 사람이 변하는 것은 말씀이다. 지난 2000년 동안에 교회사를 통해서 수많은 프로그램들, 방법들, 역사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변하는 주된 방법은, 유일한 방법은 무엇이냐하면 말씀이다. 더디기는 하지만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언제나 말씀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교회는 언제나 끊임없이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러분 바울의 경우를 보자. 바울이 빌립보에서 놀라운 경험을 체험했다. 귀신 들린 여자에게 귀신을 쫓아주면서 그것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하는 가운데 지진이 났다. 딱 때맞춰서 말이다. 흔들리면서 옥문이 다 열렸다. 엄청난 성령의 개입을 보았다. 그런데 보통 성령의 역사, 기적을 체험하고 나면 사람들이 그 다음부터 거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 기적을, 그런 초자연적 역사를, 그런 은혜가 일어나기를 자꾸 바라보고 추구할 수밖에 없는데 데살로니가로 달려가면서 바울이 기대하고 있고, 데살로니가에 가서 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건 기적이 아니라 말씀이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갔다. 말씀에 집중했다. 데살로니가에 가서 세 안식일 동안 말씀만 전했다. 왜 말씀으로만 사람이 변한다고 말하는가. 그 비밀을 오늘 본문인 데살로니가에서의 이야기가 잘 풀어주고 있다.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야기를 보면 말씀으로만 사람이 변한다고 하는 이 비밀을 쉽게 발견하기가 어렵다. 언뜻보면 정반대처럼 보인다. 말씀을 전하는데 거기에 있는 것들을 보니까 암만 말씀을 전해도 사람은 안 변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런 느낌이 온다.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면서 뜻을 풀어 증언을 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회당에 가면 구약성경 가운데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뽑는다. 그 메시아에 관한 예언 가운데 어떤걸 이야기하는가 하면 바로 메시아의 고난이다. 이사야 53장 같은. 그리고 메시아의 부활, 이런 것을 예언들을 뽑아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이야기한다. 예수를 소개한다. 예수께서 어떻게 고난 당하시고,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어떻게 부활하셨는지를 증거하면서 그러면서 마지막에 강력한 결론으로 말한다. 그러니까 바로 그 예수가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건 전형적인 바울의 전도 설교의 패턴이다. 바로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랬더니 그 중에 일부 유대인과 많은 무리의 경건한 헬라인들, 경건한 헬라인들이라는 것은 신아에 관심있는 헬라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귀부인들, 귀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유력한 분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고 한다. 따랐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말 그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면서 그 말씀으로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가만히 있을 마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세상에서 제일 성실한 놈이 마귀이다. 절대 가만히 있을 마귀가 아니다. 이렇게 말씀이 증거되는데,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말씀이 증거되는데 그걸 놔둘 마귀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공격을 하는 것이다. 5절 말씀을 함께 보면,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일부 유대인들은 말씀을 듣고 믿었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갖고 말하고 있는데, 그쪽은 자기들이 전문가이다. 그러니까 교만한 마음에 시기가 가득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저자.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활보하는 어떤 불량한 사람들, 어떤 불량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영어 성경을 보니까, bad character라고 설명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성질 더러운 놈들이다. 아주 질 나쁜 사람들이다. 이런 놈들을 동원해서 바울과 실라를 핍박하기 위해서 야손이라고 하는 믿는 유대인의 집에 몰려가서 찾다가 못 찾으니까 야손과 형제들, 여기에서 형제들이라고 하는 것은 야손의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 믿는 사람을 다 끌고 읍장한테 가서 고발을 한다. 그런데 그 고발내용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6~7절 말씀을 함께 보면,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집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여러분 여기에서, 이 고발 내용을 보면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분명 바울과 실라가 회당에서 한 것은 구약성경 말씀을 가지고 전한 것이다. 그래서 소동이 일어났는데 유대인들이 고발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울과 실라가 가이사의 어떤 통치를 거역하고 예수라고 하는 다른 임금이 있다고 말하면서 일종의 다른 왕국을 말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그들이 거짓말 하고 있는 것인가. 바울과 실라는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읍장이니까 정치적으로 몰아가야지만이 먹힐 것 같아서 그렇게 그들이 꾸며내고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 모함은 그게 모함이 되기 위해서는 근거가 없으면 안 된다. 무언가 근거가 있어야 한다.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근거는 있다. 무슨 근거로 예수를 다른 임금이라고 표현하면서 고발하고 있는가. 그건 바로 그리스도”, “메시아그것 때문에 그렇다. 메시아라는 말은 헬라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 아닙니까. 기름부음 받은 자. 그런데 그 메시아가 어떤 사람이냐, 어떻게 예언되어 있느냐,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 왕국을 회복하면서 구원하실 분이다. 그렇게 알려져 왔다. 물론 영적인 분이고, 영적인 것이지만. 이 사람들은 그걸 이용해서 다른 임금이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하면서 고발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대단히 예외적인, 아주 예민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메시아라고 하는 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굉장히 예민한 단어이다. 누가 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너무 민감한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 고발하는 것이지만 혹시 잘못해서 예수가 메시아라고 말한다는 자체를 그들은 너무나도 힘들어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말하는 자체를 싫어한다. 여러분 지금도 그렇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면 정통 유대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유대교를 많이 믿는다. 그 사람들을 보면 머리를 꼽쓸하게 하고, 한 여름에도 오바 코트를 입고 다닌다. 심지어 털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굉장히 종교인들이다. 그런데 정통 유대교 사람들이 우리를 절대 크리스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크리스찬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부르냐면 노쯔리라고 부른다. 노쯔리는 나사렛 것들이라는 뜻이다. 아주 비하하는 말이다. 그 정도로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는 표현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른 임금, 곧 예수라고 하는 이가 있다는 표현을 썼을까. 고발하면서 말이다.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지만 실제로 그때 어떤 나라가 그곳에 임한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것이 정보나 지식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으로 임하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가운데 정말 자기도 몰랐지만 어떤 나라가 임하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통치 질서가 그 자리에 임하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식의 고발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의 그 고발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나라그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게 분명한 것은 데살로니가 전서 2장에 처음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 전했던 이야기를 바울 사도가 하고 있는 게 있다. 거기 12절에 보면 이렇게 나온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자기 나라와 영광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바로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 데살로니가에서 말씀을 전할 때, 처음 그때 그곳에 있었던 역사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여러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말씀으로만 진정으로 사람이 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단지 정보가 아니라, 단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세상 질서 속에 잡혀 있는 우리가 변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방법에 익숙해진 우리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결국은 자기 나름대로 가치관, , 방식들을 갖고 있는데, 그게 사실은 세상의 통치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그런 세상 질서 속에 잡혀 있고, 세상의 방법에 익숙해진 사람이 변하려면 절대 감정적인 충격이나 흥분이나 감동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 백 번 충격 받고 눈물 흘리고 난리쳐도 그거 가지고 사람 안 변한다. 정말 변하려고 하면 바로 그 세상 나라를 완전히 뒤집는 또다른 나라가 임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이 변한다. 나라가 바뀌지 않고는 그 사람은 안 달라진다. 나라가 바뀌어야 한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인가 하면 바로 말씀을 통해서 된다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심어지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걸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유일하게 그 비유를 해석까지 하셨다. 그 해석을 하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냐면 씨를 천국 말씀이라고 하셨다. 그냥 말씀이 아니라 천국 말씀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씨가 길 가와 돌짝밭과 가시덤블과 좋은 땅에 뿌려진다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아시는 것처럼 길 가, 돌짝밭, 가시덤블, 좋은 땅은 무엇을 말합니까? 마음을 말한다. 받는 자의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거기에 뿌려진 씨는 그냥 말씀이 아니다. 지식이 아니다. 정보가 아니다. 사상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천국 말씀이다. 결국 그건 하나님 나라가 말씀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비유의 이야기이다.

     

    여러분 그렇다. 말씀을 전할 때 어떤 말이나 정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가, 그곳에 임하는 게 진짜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말씀이 전해지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는 반발하고, 핍박한다. 전도해보신 분은 안다. 하나님 말씀 전하면 안 그럴 것 같은 사람도 막 반발한다.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무식하게 나온다. 하나님이 있으면 보이라고 한다든가, 원래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이라고 성경에 그렇게 나와있는데도 불구하고 보이라는 둥, 내 눈앞에 데리고 오라는 둥, 내 주먹을 믿으라는 둥, 무식하게 간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유가 있다. 그들이 말씀에 반발하는 것은 사실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다. 공격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아는 것이다. 기존의 자기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침범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세상 나라, 자기 왕국, 사단의 왕국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방어모드가 발동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발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씀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했던 것이다. 반면에 또 한 가지. 말씀 앞에 있는 또 다른 반응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러분, 받아들인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가는 것이다. 여러분, 그렇게 그 사람 속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면 그 사람이 변한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래서 사람은 말씀으로만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가. 우리에게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려면 어떤 영적인 역사가 우리에게 임해야 하는가. 이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는 그 표현이 데살로니가에서 말씀을 전할 때 바울의 이야기를 소개한 성경 말씀에 딱 나와있다. 너무 중요한 표현이다. 3절 말씀을 함께 보면,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17:3) 여기에서 어떤 표현인가 하면 뜻을 풀어라는 것이다. 여러분 이건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뜻을 풀어라는 이 표현은 성경에 딱 두 번 나온다. 그런데 여기하고 또 한 군데 나오는 것이 어디인가 하면 누가복음 2427절이다. 거기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여러분 그 얘기 다 아시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중 둘이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실망해서. 그때 그 길에서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함께 동행하신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해 주신다. 그런데 신기한게 무엇인가 하면 그때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풀어줬던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다. 그건 바로 무엇인가 하면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죽고, 부활하신다는 그 이야기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 이야기, 실제 일어난 이야기, 그것이다. 똑같은 말씀을 풀어준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에 몰랐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러다가 나중에 도착해서 음식을 먹는데 주님이 그 음식을 떼어주는 순간 알았다. ‘아 예수님이시다.’ 왜냐하면 성찬식이 익숙하니까. 그런데 그후로 알고보니 주님이 사라지셨다. 그후에 그들이 깨달으면서 한 말이 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이 표현이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이게 바로 데살로니가에서 나온 뜻을 풀어와 같은 말이다. 이 말이 왜 중요한가 하면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그들이 한 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이게 중요하다. 바로 이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그냥 알았다고 끄덕 거리면 안 된다. 그렇다고 동의하는 정도로 끝나면 안 된다. 몰랐는데 새롭게 알았네 그 정도도 안 된다. 뜻을 풀어주시는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져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생명 에너지가 올라온다는 뜻이다. 능력이 온다는 뜻이다.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러분 이게 중요하다. 말씀을 들으면서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그런 뜨거운 역사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말씀으로 위로 받는다. 저도 참 많이 경험했다. 아무 것도 아닌 말씀 한 마디 때문에 두 시간을 운 적도 있다. 너무 감격해서 말씀 한마디 때문에 말씀으로 위로 받고, 말씀으로 힘을 얻고, 상황을 똑같은데 그 말씀하나 받은 것 때문에 이제 두렵지 않다.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죽기 밖에 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말씀으로 결단하고, 그렇게 주저했던 것을 결단하고, 말씀으로 세상과 죄와 마귀를 이기는 사람, 그런 인생, 전 그것이 여러분일 수 있기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바로 그 순간 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다. 누가 그 사람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는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코로나19로 인해서 온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도 모든 부분에서 일상과 정상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 모두가 삶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명도 예외 없이. 그런데 제가 볼 때 이 코로나19로 영적으로 볼 때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그 본질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다. 모이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만이 아니다. 저희 교회만 해도 7주 동안 못 모였다. 8주째 모일 때도 다 모이지 못하고 사회적 거리두기 하고, 마스크 쓰고 모였다. 여러분이 그런다. 마스크 쓰고 예배드리는 게 너무 힘들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마스크 쓰고 있는 사람 앞에서 설교하는 저도 힘들다. 도대체 이게 반응을 볼 수가 없다. 지금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인지, 비웃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눈만 보이니까 알 수 있는 것 딱 한 가지 있다. 졸고 있는지, 안 졸고 있는지 그것만 안다. 정말 답답하다. 정말 힘들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진짜 어려운 게 아니다.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은 이게 아니라 Second Wave가 있다. 두 번째 파도가 밀려오고 있는데 이게 진짜 교활하다. 우리는 이 세상을 섬기는 빛과 소금된 입장에서 정말 소중한 예배를 갖다가 당분간 모이지 않고 각자 영상으로 예배 드리는 결단을 했다. 이건 정말 우리가 힘들게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영상예배를 드리다 보니 그 안에 교활한 노림수, 공격이 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다 보니 이게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굳이 교회까지 갈 것 없이 그냥 이렇게 해도 괜찮겠다. 어떤 교인들은 우리 교회 영상 예배가 라이브로 중계되는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게 앞으로 종종 사용해야겠다는 것이다. 머리가 하애졌다. 여러분 절대 신앙생활은 편하게 하면 안 된다. 그럴 수가 없다. 좁은 길이다. 예배는 쉽게 드리는 게 아니다. 대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너무나 엄청난 불신앙의 문을 열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이 직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예배를 양보하다 보니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 꼭 교회에 너희가 모여야 겠냐고 한다. 안 모이면 안 되겠냐고 한다. 이 소중한 우리의 것을 보고 그들은 꼭 그렇게 모여야 되냐고 말한다. 안 모이면 안되냐고 말한다. 더 기가막힌 것은 그렇게 말할 때 우리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놨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게 지금 심각한 어려움이다. 본질을 놓치고 있다. 지난 번에 한 성도님이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나이트 클럽, 술집은 바글바글하다는데 왜 교회는 모이면 안 됩니까?’ 저한테 물어보시면 안 된다. 하지만 저는 대답했다. 왜냐하면 나이트 클럽 술집은 지들 나라이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런 상황 속에서 아주 교활하게 공격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신앙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모두가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말씀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그 신앙의 본질적 역사로 돌아가야 한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냥 말씀을 본다는 게 아니라 이 심령 가운데, 나의 중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냥 말씀 보는 게 아니다. 내가 말씀을 펼치는 순간, 내가 말씀을 묵상하는 순간, 바로 내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것을 나는 믿는다. 고백하고 체험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러분 가정에서 말씀을 읽고 나누고 고백하고 선포함으로, 그 가정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 믿는다. 그 가정 가운데, 그 식탁에서, 어떤 자리에서, 누군가가 말씀을 읽고 있으면 그 가정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줄 믿는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니까. 하나님의 나라이다. 여러분, 온 교회가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으로 돌아가서, 다른 거 할 것 없다. 이 교회가 오직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으로 돌아가서 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제대로 서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절대로 동호회가 아니다. 교회는 사교클럽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 역사하셔야 한다. 강단 뿐만 아니라 모든 모임 가운데 말씀이 역사하셔야 한다. 그래야 이게 하나님 나라이다. 이 사회와 이 나를 위하여 우리는 말씀으로 기도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온전한 말씀을 전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해야 한다. 전 분명히 확신하지만 이 나라, 이 백성의 소망은 피 복음 밖에 없다. 십자가 복음 외에는 답이 없다. 그걸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말씀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여러분이 그 통로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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