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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산나교회]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 요한복음 6:16~21
    신약/요한복음 2020. 4. 18. 17:48

    며칠 전에 뉴스를 보니까 미국 항공모함 함장이 코로나19로 항공모함 내에서 감염확산이 일어나자 그걸 막기 위해서 SOS를 요청했다가 그것 때문에 해임 당하는 뉴스가 있었다. 그런데 함장이 배에 있는 승조원 가운데 전염병이 돌고 있으니 구해 달라는 SOS를 친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이다. 내용을 보니 문제가 된다. 내용이 이렇다. SOS 내용이 적절하지 못했다. 위험하다 정도가 아니라 분위기가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 빨리 배에서 내리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사람이 SOSE-Mail로 보냈는데 그 E-Mail을 해군 본부에만 보낸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자기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에게 다 보냈다. 그러다 보니 이것이 그대로 언론에 유출이 되었고, 해군의 위상을 떨어뜨린 것이 되었다고 해서 함장이 해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저는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이 함장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이 함장이 물러갈 때 배의 승조원들이 다 박수를 치면서 위대한 함장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함장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밖에서 볼 때는 그 항공모함은 그야말로 항공모함이다. 승조원이 5천 명이 넘는 큰 배이다. 그런 배이기 때문에 코로나19 감염자가 백여 명 나왔다고 해서 그렇게 난리를 치겠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내부에서는 다른 시각이다. 그 내부에서는 배라는, 어쩌면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모두가 빠졌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배라는 제한적 공동체 안에서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 즉 패닉에 빠져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커도 항공모함도 배는 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함장이 과잉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가 된다.

     

    오늘 제가 말씀을 코로나19로 난리가 난 항공모함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 항공모함의 상황이 지금 코로나19로 고통 받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배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공동체이다. 그것은 특별히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요소들 중에 두 가지가 아주 두드러진 공동체가 배라는 공동체이다. 하나는 한계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런대로 잘 갈 수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런대로 안전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풍랑이 치거나 지금 이야기처럼 내부에서 전염병이 돌게 되면 그 배는 대책이 없다. 방법이 없다. 정말 한계 앞에 너무 무력한 것이 바로 배라는 공동체의 특성이다. 사실 모든 공동체가 다 갖고있는 한계 앞에서 무력한 것을 너무 두드러지게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배라는 것이다. 이게 첫 번째이다.

     

    두 번째로 또 한 가지. 배는 공동운명체라는 것이다. 배가 보여주는 뚜렷한 특징은 공동운명체라는 것이다. 배는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이 잘못해서 죽으면 다같이 죽는 것이다. 일부는 살고, 일부는 죽는 게 아니라 죽으면 다같이 죽는 것이다. 아주 절박한 공동운명체라는 특징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선상공동체라는 말도 있고, 같은 배를 탔다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게 바로 배이다. 제대로 된 공동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운명 공동체이다. 그 가운데 한 개인이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혼자 살 수 없는 게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생각은 이기주의이다.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나 혼자, 내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하는 생각이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가장 나쁜 생각이 된다. 이번 코로나19가 그걸 너무나 잘 보여줬다. 우리는 서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몰랐다. 한 사람이 아프면 그 사람만 아픈 게 아니다. 우리가 다 아플 수 있다.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이것이 코로나19가 보여주는 운명공동체라는 특성이다. 배는 그런 공동체의 특성, 즉 운명 공동체라는 특성을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배를 타고 가는 항해와도 같다. 결국 인생은 공동체 속에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같다. 인생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묘사들 가운데 이 항해라는 것 같이 인생의 이야기를 절절하게 묘사한 것이 거의 없다고 말할 만큼 이 항해는 인생에 대한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래서 오늘 말씀, 이 요한복음 6장의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6장의 이 갈릴리 호수에서 있었던 풍랑 만난 배의 이야기는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어쩌면 일부러 만든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저 어쩌다 풍랑이 일어났고, 생긴 사건이 아니다.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든 상황과 그 상황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 이게 바로 이 말씀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이 코라나19로 고통 받고 있는, 풍랑 맞은 선상 공동체와 같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려고 우리 주님께서 준비하신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어떻게 우리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오늘 말씀 내용은 이렇다. 주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러떡 다섯 개를 가지고 남자만 오천 명, 다 합치면 이만 명이 되는 군중을 먹이신 후에, 사람들은 거의 미치기 시작했다. 성경에 나오는 표현대로만 해도 미치기 시작했다. 성경에 표현된 말로 보면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잡아서 왕으로 삼으려고 할 정도였다. 사람들이 흥분했다. 이건 메시아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잡아서 왕으로 세우려고 할 정도로 흥분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군중들은 제쳐놓고 제자들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왔다갔다 하는 게 아니라 제자들에게만 관심을 줬다. 그리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정말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 세팅에 들어갔다. 그게 오늘 말씀이다.

     

    요한복음 615~16,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여기 이 내용을 마태복음 1422절을 참고해서 보니 이렇게 재구성된다. 예수님은 그런 무리를 피해서 혼자 산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먼저 가버나움으로 가라고, 즉 먼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산으로 피하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먼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라고 했다. 제자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 주님께서 자기들만 먼저 가라고 하시는지, 자기들이 주님만 두고 혼자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어리둥절한 상태로 있다가 날이 저물게 되었다. 여기서 이 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난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다.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따지면 초저녁이다. 초저녁은 보통 세시에서 여섯시 사이를 말한다. 그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고나서 나오는 저물매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둘째 저녁이다. 이것은 여섯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이다. 바로 그 시간이 된 것이다. 그 시간이 되니까, 해가 지니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일단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로 나간 것이다. 주님께서 가라고 하셨으니까, 당신이야 어떻게 해서든지 오실 방법이 있겠지 하고 나갔다. 그런데 나가 보니까 석양에 호수가 너무 아름답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의 석양은 너무 아름답다. 그때가 유월절 근처이기 때문에 해가 지면서 보름달이 떠오른다. 얼마나 환상적인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제자들은 그만 거기에서 모든 걸 잊었다. 그 좋은 풍경 속에서, 정말 평화로움 속에서 다 괜찮은가보다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의 표현들 때문에 그렇다. 마가복음 65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음이 둔해졌다는 게 무슨 뜻인가. 영적인 어떤 의미, 영적인 긴박감, 상황,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그냥 그 분위기, 그 상황에 빠져버렸다. 바로 이런 상태로 배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서 문제가 생겼다. 사실 날씨가 좋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은 갈릴리 호수에서는 굉장히 흔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제자들에게는 익숙한 일일 수 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제가 인생을 살아보면서 많은 것을 통해서 보니 생명을 위협하는 위협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여러 번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두려움은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 상황 속에서 아주 힘든 상황을 보내고 있었다. 성경의 표현대로 보니 힘겹게 노를 저으면서 여기에서 살아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미 시간은 한밤중이다. 그런데 그 풍랑은 치고, 노를 저야 하니까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러다가 방향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고, 잘못하면 배가 뒤집어 지거나 혹은 암초에 부딪쳐 죽을 수 있는 상황이다. 정말 많은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이 악천후와 어두움, 이건 정말 사람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 아닌가. 어두움과 악천후는 원천적 공포를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 그들이 빠져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 코로나19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똑같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오게 되었는가.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서 이런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가. 성경을 보니 답이 이것이다. 모르겠다. 모른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힘든 일이 일어났지, 무엇이 잘못되었지, 우리는 그 생각하지만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니 모른다.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자 그런데 성경을 다른 것을 정확히 이야기해주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왔는지 말해주지 않지만 이 어려움의 본질은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즉 마귀가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면서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면 그 공격이 궁극적으로 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이게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갑자기 일어난 큰 바람과 파도가 이 어려움의 핵심이 아니다. 우린 그렇게 생각한다. 하필 그때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쳐서 어렵다고 한다. 이게 어려움의 핵심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어려움의 대책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음에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바람이야 제멋대로 부는 것 아닌가. 풍랑이야 언제든지 부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갈릴리 호수에 살면서 배를 안 탈수도 없다. 대책이 없다. 여러분, 지금의 어려움이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한다면 마찬가지이다. 우린 대책이 없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코로나19 바이러스, 백신이 나오고 치료제가 나오면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전문가들이 말한다. 이거 지나가고 나면 또다른 종류의 바이러스가 올 것이다. 또다른 종류의 경제적 위험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는 등등의 말을 하면서, 이 바이러스가 지금 어려움의 핵심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냐. 이 어려움의 핵심은 무엇이냐. 그걸 성경이 말해주고 있다. 17절 말씀을 함께 보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말씀이 은밀하지만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이것이다. 그들에게, 이 선상공동체에게 정말 어려움이 오는 가장 중요한 요인, 핵심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거기 함께 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배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의 핵심이다.

     

    모든 인생의 어려움이 사실은 그런 것이다. 여러분, 다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지금 경험하고 있으실지도 모른다. 우리 삶 가운데 원하지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되면 정말 힘든 시간을 갖게 되면, 그때 가장 강력하게 들어오는 시험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나하고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잊읒셨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다. ,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의심이다. 의심이 아니라 그 생각들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고난의 핵심이다. 이것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무너뜨려리고 하는 마귀의 궁극적, 노리는 포인트이다. 그날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도 그랬다. 큰 바람과 파도가 문제가 아니고 정말 힘겹게 노를 저으면서 해치고 나가려고 하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핵심이 아니고, 진짜 문제는 그 배에 예수님이 없다는 것이다. 그 배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 예수님 없이 그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원치않은 고난을 겪으면서 일상의 생활을 다 포기해야 되는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고, 다가오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것들은 예측도 할 수 없을 만큼 정말 힘들고, 우릴 두렵게 하는 것이지만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신앙의 사람들에게 진짜 무서운 싸움은 그런 상황적 어려움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 같은 그 문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이 고난의 현장 속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이게 중요한 포인트이다.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 고난의 현장에 주님이 함께 계시면 고난이 아니다. 상황이 별거 아니여도 여기 주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이 고난 못 이긴다. 이게 포인트이다. 이것이 바로 이 모든 두려움의 핵심이고, 우리 마음이 무너지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이런 고난을 이기는 처방도 분명하다. 이런 고난을 이기는 방법도 분명하다. 그건 주님을 그 풍랑 만난 배 한 가운데로 모셔드리는 것이다. 다른 것 없다. 주님을 그 풍랑 만난 배 한가운데로 모셔드리는 것이 답이다. 이것 밖에 없다.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그쳐야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경제가 다시 살아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주님을 우리 고난의 상황, 어려움의 상황, 우리 인생 한복판으로 모셔 드려야 하는 이야기이다. 그래야 이기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모든 걸 극복하는 것이다. 이게 답이다. 이게 처방이다. 이게 바로 신앙이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을 모셔 드릴 수 있는가. 이 풍랑 만난 배 한복판에 주님을 모시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날 그때 제자들이 했던 영적인 체험을 우리도 동일하게 해야 한다. 이건 상황과 역사가 아무리 바뀌어도 전혀 다르지 않은 동일한 것이다. 그날, 그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이 했던 영적인 체험을 우리도 동일하게 해야 된다. 정말 우리가 인생이라는 항해를 하면서 당하는 많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승리하고 아름답게 가려면 반드시 해야하는 그 체험, 그 체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절로 21절 말씀을 함께 보면,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풍랑 가운데 벗어나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다. 그런데 마가복음 표현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이 오셨다. 배로 바로 들어오신 게 아니라 가까이 오긴 하셨는데 지나가려고 하셨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고난 당하고 어려움 가운데 애쓰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배로 바로 들어오신 게 아니다. 그런 일이 있는 게 아니다. 신앙이 그런 게 아니다. 가까이는 오셨다. 어떤 영적인 일이 있어야 그 예수님이 들어오신다. 어떤 영적인 일이 있어야 예수님이 그 배로 들어오신다. 아니면 지나가신다. 그 배에는 예수님이 꼭 필요한데, 예수님이 자동으로 들어오시는 게 아니다. 어떤 영적인 것이 있어야 예수님이 오신다. 그 어두움 가운데, 풍랑 가운데, 바다 한복판에 그때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셨다. 정말 꼭 필요한 예수님, 런데 그때 예수님을 본 제자들의 반응은 의외다. 반가워한 게 아니라 놀랐다. 마가복음 표현으로 하면 유령인가 하여 소리질렀다고 한다. 왜 그런가. 상식과 편견 때문에 그렇다.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 중심 때문에 그렇다. 어떻게 바다 한가운데 배도 안 타고 올 수가 있느냐는 생각 때문에 조금 전에 오병이어의 사건을 다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인간의 한계 속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잡고 있는 것은 인간적 편견이다. 절대로 물 가운데로 사람이 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큰 바람이 불고 엄청난 파도가 치면서 배가 뒤집어 질지도 모르는 긴박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상황이 어려우면 정신이 없다. 재정신이 아니다. 바람은 불고, 파도는 치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정신이 없고, 여유가 없는 그 상황, 마음에 여유가 없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 정신없고 힘든 마음을 뚫고, 인간으로 갖고 있는 편견과 상식의 한계를 뚫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그때 그들에게 들려온 음성이 있었다. 이게 중요하다. 이게 반전이다. 그렇게 정신이 없고, 그렇게 여유가 없는 그 마음을 뚫고, 그런 인간적인 상식과 어떤 편견과 한계를 뚫고, 그들에게 들려온 음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음성을 들었다. 이게 너무나 중요하다. 그 음성이 무엇인가. 그 음성이 바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 이 상황에서 이 음성을 듣는 것이 핵심 포인트이다. 이것이 고난을 이기는 영적인 처방이고,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그 심장에 심어주고 심었던 메시지이다. 이것이 성경이 지금 동일하게 풍랑 만난 공동체 같은 상황 속에 있는 우리에게, 힘겹게 지금 해치고 나가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이 시간에 들려주고 계신, 말씀하고 계신 메시지이다. 답은 이것 하나이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음성을 듣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 신앙인들에게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음성을 들어야 한다. 여러분 경제적인 상황이 무너지고 있고, 앞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정말 힘들어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음성을 들어야 한다. 여러분, 자신의 건강이 흔들리고, 자녀의 건강이 어려워지고, 심지어 그 자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고문하듯이 밀려오고 있는 그 상황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내니 두려워히자 말라 이 음성 들어야 한다. 정말 사람과의 관계가 다 깨어지고, 삶의 기반이 다 무너지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너무나 외롭고, 혼자 될 것같은 그런 두려움 속에 있는 상황속에서도, 우리는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음성을 들어야 그래야 신앙인인 것이다. 앞날이 불확실하고, 눈앞에 있는 장애물들을 내가 도저히 넘을 수 없어서 정말 절망감이 엄습하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 나라, 이 민족, 정말 어떻게 할지 모르는, 전망이 어둡다. 정말 낙심되고 마음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 있지만 내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내니 두려워히자 말라 이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이다. 이게 믿음의 이야기이다. 그 음성을 듣고 기쁨으로 주님을 모셔드리면 그 풍랑이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아름답게 설 줄 믿는다. 이게 말씀이다.

     

    그런데 마음에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내니 두려워히자 말라 그 음성 하나 듣는 것이 그렇게 모든 고난을 다 이길 수 있는 답이 되는 것이 맞습니까. 너무 과장된 건 아닐까요. 아니다. 어떤 고난에 있다 할지라도 그 고난을 뚫고 들어오는 이 음성,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된다. 여러분, 신앙이 왜 위대하냐면 너무나 분명한 팩트를 갖다가 이 고백 하나로 이길 수 있어서 신앙 아닙니까. 너무나 분명한 팩트도 바로 주님 앞에 드린 고백 하나, 영적 체험 하나로 다 이길 수 있는 게 신앙이니까 위대한 것이다. 정말 연약해보이지만 이 주의 음성 듣는 것 이 하나만 있으면 된다. 제대로 듣기만 하면 이걸로 충분하다. 따로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걸 보여주었던 한 신앙의 사람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 개척초기였다. 그런데 성도 중 한 분이 조희도 화백이라는 분이다. 그분은 화가였다. 이분은 파란만장한 삶을 산 분이었다. 경주 근처 분이다. 어릴 때부터 힘든 환경에 살았다. 아버지는 순회 이발사였다.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 시절에 아버지의 면도칼, 가장 중요한 것을 훔쳐서 가출한 사람이었다. 사춘기 때는 폭력과 싸움에 어울리고,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조폭에 들어갔다가 도망치기도 하고, 산에 들어가 숨어있기도 했다. 이분이 천부적인 재능이 미술에 있다. 그래서 절에 들어가서 숯으로 데셍을 공부하면서 미술을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전국대회에 입선을 했다. 굉장히 탁월한 분이다. 미술을 천부적 재능을 갖고 그리는데 한번도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전문가들이 볼 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구도도 안 맞고, 기본이 안 되어 있다고 한다. 파악하기 힘든 분이다. 신앙적으로도 조금 헷갈리는 분이다. 열심히 교회는 나오는데 한밤중에 술 먹고 나면 꼭 저한테 전화를 해서 주정을 한다. 목사 괴롭히기가 취미이다. 그리고 신앙생활 하면서도 담배를 영 못 끊은 게 아니라 안 끊는다. 많은 사람이 시험 들게 하고 말을 막한다. 그래서 이거 정말 신앙이 없는 게 아닌가 싶은데 제가 볼 때 정말 신앙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분이 얼마나 특이한지, 처음에 교회에 올 때 한동안 교회 생활을 안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인 중 한 분이 전도했다. 그분이 제일 먼저 물어본 게 무엇이냐면 그 교회 목사가 배가 나왔냐고 물었다. 하도 의아해서 우리 목사님 배가 그렇게 나온 것 같지는 않은데 왜 물어보느냐고 하니까, 하는 이야기가 먼저 교회에서 교회를 떠난 이유가 그 교회 목사님이 배가 조금 나온 분이었다. 그걸 보고 그분이 목사님 앞에 가서 이야기한 것이 목사님, 목회하려면 배부터 넣으세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왜 그러냐고 하니 아니 생각해 보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시는데 배가 이렇게 나와 있으면 그림이 되냐고, 그림이 안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하고 교회를 떠났다. 그러니까 새로운 교회를 오면서 제일 먼저 따진 것은 설교가 좋으냐가 아니라 배가 나왔느냐이다. 그 분이 교회에 왔는데 그 다음부터 제가 그분 때문에 밥을 제대로 못 먹었다. 밥 먹다가 그분 이야기가 생각나면 수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분이다. 이분이 정말 신앙인으로서 경계를 무시하는 스타일이고 그래서 정말 신앙인이 맞는지, 아닌지 헷갈리지만 이분이 정말 신앙인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그분이 나중에 성화를 그려서가 아니라 제가 그분의 간증을 들었고 알기 때문이다. 이분이 오셔서 얼마 안 돼서 제가 요한복음 설교 할 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바로 이 말씀, 내니 두려워하지 마라를 제가 기억하는 중에 말씀을 제대로 받은 사람 중에 가장 놀라운 사람처럼 받으셨다. 말씀으로 은혜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냥 받은 것이다. 알고 봤더니 이분은 사실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소리 지르고, 악악대고, 사람들을 공격하고, 룰을 깨고, 일탈하고 그랬다. 너무 두려움이 많아서 그렇다. 너무 불안해서 그렇다. 그날 그 말씀이 그 마음에 들어갔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이분이 가서 바로 현판을 썼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래서 집에 붙여놓고, 그때부터 이분이 삶 가운데 모든 것을 다 주님 앞에 내놓고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성경을 얼마나 사진보다 꼼꼼하게 그렸는지, 성경 글자 하나까지 다 그리다가 손에 마비가 오면 전화한다, 기도해달라고, 제가 가서 안수기도 하고, 또 그리고, 성화를 그리고, 겟세마네 기도, 온전히 그 삶을 주님 앞에서, 주를 위해 살아가는, 여전히 술도 먹고 그렇지만, 그런 삶을 사는 것이다. 그분은 60대 중반에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분은 암투병하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정말 힘든 가운데 있지만 바로 그 말씀을 붙들고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주신 사명대로 성화를 그리면서 주님 앞에 갔다. 저는 그분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지막에 임종예배를 드릴 때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 저를 보고 목사님, 일 없습니다. 문제 없습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셨으니 괜찮다. 눈물이 핑돈다. 그러면서 정말 힘없지만 희미하게 웃으시는데 그걸 잊을 수 없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 말씀 붙들고 가셨다.

     

    풍랑 만난 배와 같은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 상황도 복잡하고, 마음도 경황이 없고, 갖가지 음성이 밖에서, 안에서 들려오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정말 이런 상황이지만 그 가운데 이 모든 걸 뚫고 지금도 들려오는 우리 주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가장 어려울 때 그걸 들으세요. 가장 마음이 무너질 때 그걸 들으세요. 가장 마음이 격동될 때 그걸 들으세요. 너무나 불안하고 외로울 때 그걸 들으세요.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게 그 음성을 듣고 아름답게 승리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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